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혁명 (문단 편집) === 여담 === *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에 의해 [[남미]] 지역 대부분이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지만 정작 해방된 국가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백인 혈통인 [[크리올]]들이었다.[* 순혈 백인은 물론 혼혈도 포함된 주민도 포함된다.]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아메리카 원주민]]을 [[스페인 식민제국|스페인 식민정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정도로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건 아이러니이자 흑역사다. 오히려 적당히 하라며 만류하던 스페인에서 벗어난 현지 백인들은 더 열심히 학살을 벌였다. *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공화정이 운 좋게도(?) 추분 날 성립된 덕에 잠시 쓰였던 [[프랑스 공화력]]에서는 천문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추분]]이면서 혁명이 일어난 날이기도 한 그날을 공화력의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었다. 혁명력은 12년 남짓 사용되다가 폐지됐다. * 혁명 전까지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을 "[[찰스 1세|군주]][[청교도 혁명|를 처형하는 과격하고 무도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혁명 초기에는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을 보고 "너희도 우리 따라하네."라면서 좋아했다. 심지어 일부 영국 왕족들과 귀족들도, 학살당하는 프랑스 귀족들을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부터 혁명의 과격성을 지적했던 영국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보수주의의 성전(聖典)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년)을 저술한 [[에드먼드 버크]][* 허나, [[에드먼드 버크]]는 오히려 [[보수주의]]를 극도로 혐오하고 스스로 [[진보주의|진보주의자]]를 자처했는데, 실제로도 버크는 온건한 진보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했던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왕족과 귀족들은 혁명이 자국에 퍼질 것을 두려워했고 이는 혁명 후에 프랑스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과 싸워야 했던 이유였다. *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썰전|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온건한 자유주의자였던 버크는[* 위의 각주에서 서술했듯이, [[에드먼드 버크]]는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보수주의|보수주의자]]라고 보기 힘든 사람이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써서 혁명을 '''이제까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경악스러운 일'''이라고 공격하며 국왕, 귀족, [[봉건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국민의회가 '''품위도 자유도 없는 채''' 행동하고 있으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고요하고도 강인한 [[인내심]]을 가졌다고 칭송했다. 그러자 페인은 즉각 그에 대한 반박으로 <인권(The Rights of Men)>을 저술하여 버크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버크의 주장이 "세계에 대한 협잡"이라며 프랑스 혁명은 '''인권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 상태를 '''국민주권'''과 '''대표제 국가'''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 유럽의 혁명의 전개라고 봤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으로 미국은 '''자유의 챔피언'''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는 '''자유의 우승자'''로 만들었다며 시민혁명을 적극 옹호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바스티유 감옥 습격 후 정국을 주도한 국민의회는 파리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처럼, 입헌군주제로 점진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급진파라고 칭해지는 자코뱅 내에서도 당통과 같은 과격파들은 마라나 로베스피에르에게 비난받았을 정도. 이랬던 프랑스 혁명이 흑화한 계기는 루이 16세 일가의 탈출 미수와 이로 인한 필니츠 선언.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가족들은 파리를 탈출하여 프랑스 동부 국경까지 갔으나 국경을 넘지 못하고 파리로 압송됐다. 국내적으로 왕의 권위나 지지가 크게 떨어짐으로써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온건파와 지롱드의 입지가 좁아졌다. 국외의 경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전격적으로 군사동맹을 맺으며, 곧이어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프랑스 왕을 위해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주전파가 득세하도록 부추겼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며 혁명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발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 혁명의 수명을 연장하는 한편 내외부의 악재로 인한 자코뱅과 과격파의 부상은 혁명정부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노선을 변경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루이 16세가 제 무덤을 판 셈. * 현대 프랑스의 매우 엄격한 [[세속주의]]적인 풍토도 이때 성립되었다. *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왕정복고주의 세력의 반발이 극으로 치달았다. 특히 브르타뉴와 메인, 앙주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가톨릭 교회의 재산 몰수와 주일 폐지, 과도한 증세와 모병으로 인해 방데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세력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 간의 전쟁을 방데 전쟁이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브르타뉴와 메인 지역의 반란과 합쳐 '서부 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혁명 전쟁으로 인해 정부군 전력의 대부분은 국경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반란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낭트 공방전에서의 패배와 이후의 강경한 섬멸 명령으로 방데 지역은 큰 피해를 봤고, 1796년 반란은 평정됐다. 방데 전쟁 시기에 진행된 진압 작전을 '근대사 최초의 대규모 학살'이라고까지 부르는 역사가들도 있다. 혁명군의 학살이 있었던 것은 이견이 없으나 그 규모에 대해서는 최대 60만 명이라는 막연한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한 동안 혁명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며 [[방데 전쟁]]을 비롯한 반혁명 반란의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거나 반혁명파의 난동 등으로만 언급하다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때인 2012년이나 돼서야 이걸 인정했다.[* 방데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도 알려지지 않은 반란이 많았다고 한다. --이걸 보면 혁명의 이중성의 표본으로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며 "프랑스 혁명이 과연 객관적인 면모에서는 긍정적인 면모가 단점을 덮을 수 있었나?"하는 의견이 많이 오간다.--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을 추구하지 가치평가를 추구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실을 두고 긍정적이냐, 단점을 덮을 수 있나 묻는 것은 역사학이 아닌 세간의 흥미일 뿐이다.] * 대혁명이 [[반가톨릭]] 성격을 띠고 있었다 보니, [[영미권]]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던 [[소도미법]]이 프랑스에서는 일찌감치 폐지되었다. [[신성모독]]죄도 마찬가지로 이때 폐지되었고 가톨릭은 프랑스 밖에서도 점차 세속적인 영향력을 잃게 됐다. 그래서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가톨릭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프리메이슨]]과 [[자유주의]]자가 꾸민 음모"로 여겨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가톨릭 교회가 세속적인 영향력을 잃게 된 것과는 달리, 종교 권력 면에서 로마의 교황청 및 교황 본인의 권력과 위상은 더 높아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했다. 앙시앵 레짐 문서에 나오듯이 각 지역 교구를 관리하는 주교들은 봉건적 권리를 누리고 있었고, 갈리아 교회주의라 하여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독립적인 성향이 더해졌다. 그런데 이것이 혁명으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지면서 교황청으로 그 권력이 집중된 것. * 혁명 시기 혼란으로 인해 통제가 일일이 되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건 사고는 역사 자료와 문화재의 손실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서 농민의 딸로 프랑스를 구했던 영웅 [[잔 다르크]]도 피해갈 수 없어서 일부 과격파들이 그를 두고 [[왕당파]]와 가톨릭의 상징이라고 낙인 찍는 일도 있었으며 반혁명 반란 진압과 외국과의 전쟁 등으로 국내외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를레앙]]과 로렌 동레미 라퓌셀 등 그와 관련있는 지방에서 그를 기리는 기념행사가 할 수 있는 여력도 없는 탓에 중단되는 것은 물론이고 동상을 포함한 기념품과 관련 자료들이 파괴되거나 관리되지 못해 소실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전국민적인 영웅으로 다시 올라서게 됐다. 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슷한 사례로 프랑스도 잔 다르크에 대한 기록이 많이 소실되어서 오히려 영국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일어난 [[7월 14일]]은 현재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fête nationale)로 현 프랑스의 국가적 축일이자 법정 [[공휴일]]이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혁명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 기념 축제, 콘서트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기인 1989년에는 '''200주년''' 기념일([[https://fr.wikipedia.org/wiki/Bicentenaire_de_la_R%C3%A9volution|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이어서 더욱 더 성대하게 치렀다. 공교롭게도 이 해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 정상회의 의장국 순번이 프랑스였던 관계로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에서 정상회담이 열렸고 14일 밤, 파리에서 대규모로 열린 200주년 기념 행사에 당시 해당국 정상들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마거릿 대처]], [[헬무트 콜]] 등을 초대하기도 했으며 그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 앞 피라미드와 신도시 라 데팡스 지역에 위치한 신 개선문(La Grande Arche)을 이날에 맞춰 완공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용자짓을 벌인 적도 있는데, 미테랑의 초청으로 기념일 당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독일군 부대가 퍼레이드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 시민의 분노의 대상이던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는 혁명 후 몰살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외국으로 달아났다. 프랑스 혁명사의 권위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s_Lefebvre|조르주 르페브르]]의 추산에 따르면 20-30만 정도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나중에 크나큰 부메랑이 되어 프랑스 제1공화국 당시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에 귀족들 가운데에는 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빈 자리를 메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특히 해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 현대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이 프랑스 혁명 자체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다. 긍정적으로 민주적인 법안이 마련된 것이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공포정치와 내정 혼란으로 오히려 프랑스를 장기간 동안 전쟁과 학살에 휘말려 문제가 많았다고 제시한다. 여튼간에 빛과 그림자가 확실히 구분되는 혁명이었다. * 당통의 죽음은 혁명 이후 [[자코뱅파]] 내부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대립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유명하다. *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놀이기구 [[후렌치 레볼루션]]은 프랑스 혁명에서 이름을 따 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